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8세 (문단 편집) == 친(親) 나치 성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1.bp.blogspot.com/Duke%2Bof%2BWindsor.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oiOw9kLWbo)]}}} || ||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는 에드워드 8세 부부 || 1937년, 나치 독일을 방문해 환대받는 에드워드 8세 || '왕은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어기고 "왜 자꾸 독일과 안 좋게 지내려고 하냐. 독일과 사이좋게 지내자."며 자꾸 외교정책에 간섭하는 바람에 [[앤서니 이든]] 외무부 장관을 몇 번이나 난처하게 했다. 그런 탓에 퇴위 후에도 여러모로 영국 왕실에 부담을 주었으며 독일군의 영국 침공을 이용하여 왕위 복귀를 노렸다거나, 독일이 그를 영국으로 보내서 다시 왕위에 올리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실제로 영국 해군에서 프랑스 함락 전에 급하게 [[루이 마운트배튼]] 경을 모시고 올 정도로 심각하게 여겼다. 만약 그가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영국은 당장 독일과 강화하자는 의견이 우세했을 것이고 2차대전의 향방이 달라지거나 상당한 국론분열을 야기시켰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왕이 본분을 잊고 몰지각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또한 영국 정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일 함선을 타고 1937년 나치 독일을 방문해 나치 고위간부들과 식사, 파티를 즐겼으며 히틀러의 산장에 가서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는 등 사사건건 영국 정부와 충돌하였다. 특히 나치 독일의 야욕이 드러난 1939년에 나치 독일과 영국은 친밀해야 된다는 라디오 방송을 녹음 했지만 영국 공영방송국인 [[BBC]]에서 방송을 거부했다. 이후 1945년 [[바하마]] 총독을 사임할 때도 친나치 발언을 서슴치 않았고 기자들을 불러모아 나치가 미국을 무찌르는 날에 다시 복귀하겠다라고 하였으나 전시검열로 인해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에드워드 8세의 라디오 방송을 거부한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에드워드 8세 영국의 나치 왕'에 따르면 에드워드 8세는 자신의 아버지가 윈저 왕조로 이름을 바꾸기 이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독일 혈통에 대해 큰 자부심이 있었으며 어렸을 때부터 독일에 관심이 많았고 이로 인해 친독일 성향이 있었다고 한다.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르고 자신의 나라가 폭격당해 불바다가 되어도 친나치 성향을 버리지 못한 이유도 바로 성장기 시절의 친독일 성향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 조지 5세가 1차 대전으로 영국국민들의 반독일 감정으로 인해 왕실이 피해볼까 우려해 왕조 이름을 통째로 바꿔버렸는데 그 아들은 나치 독일에 푹 빠져 영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내게 되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함께 [[나치식 경례]]를 같이 하는 사진이 2015년에 발견되어 뒤늦게 논란이 된 적도 있다. 다만 [[1935년]]에 찍힌 것으로, [[2차대전]] 이전 히틀러가 인기를 얻던 시기였고 엘리자베스 2세는 이 때 고작 열 살이었다. 여담으로 에드워드 8세를 끝까지 지지한 것은 다름아닌 [[윈스턴 처칠]]. 그렇다고 해서 처칠이 에드워드 8세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은 아니다. 처칠도 에드워드 8세와 나치 독일의 연관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에드워드 8세가 민감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에드워드 8세가 바하마 총독으로 사실상 추방을 당하게 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처칠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에드워드 8세는 처칠에게 불만이 담긴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에드워드 8세의 편지에 답장 쓰는 것이 나치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처칠에게는 큰 스트레스였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한 때 국왕이었던 사람의 편지를 무시하거나 답장을 대충 쓸 수는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 나치의 [[무장친위대|SS]] 중령인 [[오토 스코르체니]]의 회고록 Meine Kommandounternehmen에 의하면 에드워드 8세는 1936년에 코버그 경[* Koburg. 독일어로 읽으면 코부르크. 에드워드 8세의 핏줄이 본디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이므로 먼 친척뻘인 인물을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독일에 사절로 보낸 듯하다.]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국]]-[[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나치 독일|독일]] 간의 3자 동맹을 맺자는 의견을 제의하였다고 한다. 또한 에드워드 8세는 버킹엄 궁과 퓌러 집무실 간의 직통 연락선을 구축하자는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